어느 날
머리가 노란 신부님이자 교수님이
처음 보는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한국에 10년을 넘게 계셔서
한국말도 무척이나 잘하셨다.
"오늘 나무를 심으려 하는데,
도와주지 않을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잘 보이려고 도와드린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 뒷산에
나무를 심고 계신 신부님께
그날도 학생 두 명이 더 합류했다.
먼저 양동이로 조그만 분수대 물을
퍼서 언덕을 올라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이걸 수십 번 반복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게 일이 끝나려나 싶어
빈 양동이를 들고 내려가려는데,
"도서관 옆에 가면 묘목이 있는데
그것 한 다발 가지고 와라."라고 하셨다.
뚜벅뚜벅 내려와 도서관 뒤편에 갔더니
한 트럭 분량의 묘목들.
그 이후 인연이 되어
매주 나무도 심고 좋아하시는
정지용 시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적인 스승으로, 아버지로
나에게 큰 위안과 조언을 주셨다.
아카시아만 자라던 언덕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오늘에는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산책길이 되어 있고
그때 심은 나무들은 성장하여
아름다움, 즐거움, 그늘,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되고 있다.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조그만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사회 초년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
후배에게 연락이 와 정년퇴임을 위해
제자들이 글을 모아 신부님께 드린다고
만든 책이었다. 그 책 속에 끄적끄적
적은 시가 있는데 지금 보면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아버지
매서운 바람이 북방에서 몰려와
앙상한 겨울 싸리나무 같은 도시,
따스한 사무실, 내려다본 거리,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우습다.
훈훈한 커피 향 속에 뿌옇게 오르는
유리창은 순간 하얀 백발의 선한
아버지가 어리다.
그해 고향 겨울은 매섭기만 매서운데
밤새 덮인 하얀 산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시간은 멈추고 고요만이 흐르는데
뒤 문 산수유 위 박새 소리만 우습다.
한낮 무거운 몸, 툇마루 옮겨
앞산을 나는 선학을 보시다.
다시 누운 훤한 방에서 아버진
'불을 켜라'하신다.
영문도 모르는 나에게
'불을 켜라' 하신다.
문득 찬서리를 허치니
어느새 새까만 눈이 흩어진다.
마치 날 조롱하듯.
2000년 12월 신부님 정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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