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에서 산 넘고 물 넘고 고개
넘어 초등학교를 왕복 8km 걸어
다녔다. 산길을 오가며 일어난 많은
일들이 나의 생애에 아름다운
추억들로 물들어 있다.
그런데, 중학교는 남한강을 건너
다녀야 했다.
가는 길만 8km가 넘는 길이었다.
산골에서 2km 내려와
남한강을 끼고 있는 아랫마을에서
배를 타고 건너, 또 걸어서 중학교를
가야만 했다. 중학교를 다니는 주변
학생들을 모아서 뱃사공 아저씨는
한 번에 건너 주셨다.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끔 뛰기도
했지만 엄마가 새벽같이 준비해 준
도시락을 챙겨 나오면 넉넉한
시간은 되었다.
뱃사공의 일은 동네 간 논의를 해서
강 옆 마을의 아저씨들이
몇 년을 번갈아 가면서 했는데
본업인 농사일 때문에 일정한
횟수만큼만 운영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쌀 몇 말을 주는 것으로
뱃삯을 대신했다.
아침에 배를 건 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나 뱃사공 아저씨가
기다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시간은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각각이라
가급적 학생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어른들도 도착하곤 했다.
그리고 강 건너에 뱃사공 아저씨는
여지없이 그 시간 되면 배를 몰아
건너왔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이 배는
강 뚝 양쪽에 기둥을 고정하고
굵은 밧줄로 연결해서
뱃사공 아저씨가 줄을 잡아당기면
배가 움직이는 원리를 이용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고 물이 불게
되면 노를 저어 강 상류로 올라가서
물살을 타고 강 아래까지 내려오는
식으로 강을 건너 주곤 했다.
친구들은 매일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는지 대부분 자취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만 혼자 걸어서
다니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곧
어두워지고 나만을 위해서 뱃사공
아저씨는 나오기가 귀찮았기
때문에 가급적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둘러메고 그 먼 길을 뛰기도 하고
숨차면 빨리 걷기도 했다.
해가 점점 일찍 기우는 계절이 되면
선생님은 한두 시간 수업을 일찍
마쳐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강가에
어둠이 짙어질 때 도착하고 말았다.
난 보통 해지기 전에 도착하더라도
건너편 뱃사공 아저씨 집을 향해
목이 터져라
"아저씨, 배 건너 줘유....."를
반복해야 했다.
그날도 수십 번의 외침에도
앞으로 규칙을 잘 지키라는 뜻인지
손전등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무섭기도 하고 울음도 나오고.
나 하나를 위해 배를 띄우기 싫은
아저씨.
결국 한참 후에야 건너편 불빛이
아른거렸다.
눈물은 범벅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청주로 가면서 긴 여정은
끝이 났는데, 3년간 통학하면서도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그 현장은 아쉽게도 충주댐이 담수를
시작하면서 모두 수몰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때의 야속한 순간은 가슴
속에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뱃사공 아저씨는 어디에 있을까?
건강하셔야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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